새로 들어온 책입니다. 

제목: 여우난골족
저자: 백석 시, 홍선찬 풀어쓰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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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일보

[책과길] 명절때 큰집가면 정말 이랬지…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마니 진할아바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여우난골족’ 첫 연)

백석(1912∼1995)의 시에는 대처에 나갔던 식구들을 명절날 한데 불러 모으는 모닥불의 훈훈함이 있다. 어느 한 구절이라도 읊조리다보면 홍시를 배어문 듯 단맛이 입안에서 넘쳐나 침이 저절로 고인다. 백석의 시는 뛰어난 문학 텍스트 이전에 그 자체로 민족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먹을거리, 민속놀이, 사투리, 의상 등 민족문화와 관련된 주옥같은 내용이 작품마다 넘쳐나기 때문이다. 백석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는 가히 최상급이다.“가장 한국적인 시”(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김현) “우리 문학의 북극성”(김윤식)…. 백석의 시를 읽으면 그날이 바로 명절이나 진배없다.

둘째 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벌:매우 넓고 평평한 땅, 고무:고모)

이렇듯 백석의 시들은 낯선 평안북도 방언과 특이한 민속적 소재가 많고 특히 신문, 문예지, 시집 등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의 표현형식도 조금씩 달라 연구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시들로 꼽혀왔다.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정본 백석시집’은 시 원본과 재수록본을 꼼꼼하게 분석한 뒤 오탈자와 띄어쓰기 등을 바로잡아놓았다.

예컨대 ‘여우난골족’의 경우 1935년 12월 ‘조광’지에 처음 발표될 때는 8연이던 것이 시집 ‘사슴’(1936년 1월)에 수록될 때는 4연으로 개작되었으며 다시 ‘현대조선문학전집’(1938년 4월)에 재수록할 때는 다시 8연으로 재개작되었다. 어휘까지 바꾼 연은 7연이다. “저녁 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노름 말타고 장가가는 노름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조광’지에 발표할 때 ‘고양이잡이’던 것이 시집 ‘사슴’에 수록될 때는 ‘쥐잡이’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도 백석의 시에는 먹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음식에 관한 백석의 묘사는 세밀하면서도 감칠맛 난다. 백석에게 음식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몸의 양식이기 전에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정신의 양식이었다. “이 그득히들 할마니 할아바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풀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 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6연)

명절은 뭐니뭐니 해도 음식과 함께 깊어간다. 여우난골은 시인의 친가가 있던 마을이다. 이 시에서는 명절날 온 가족들이 모여 정겹게 어울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명절음식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명절을 음식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이치다.

백석의 시에 홍성찬 화백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 ‘여우난골족’(창비)에서는 설빔 내음이 물씬 배어나온다. 첫 장을 펼치면 설빔을 곱게 차려입은 사내 아이가 활짝 웃으며 집에서 뛰어나온다. 설을 쇠러 큰집에 가는 길이다. 마당에는 여인네들이 둘러 앉아 차례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은 곁에서 조물조물 음식을 집어 먹다 밖으로 몰려 나가 숨바꼭질,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이,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이에 흠뻑 빠진다. 이윽고 섣달 그믐 밤.“공기놀이하고 주사위 굴리고 졸음이 오면 아랫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창문에 처마 그림자가 비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에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의 시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요즘 말로 맛깔스레 풀어낸 홍 화백은 사실적인 그림을 위해 평안도 사람들이 이주해 옛 방식대로 살고 있는 연변 산골을 찾아가 그곳에서 설을 쇠며 책의 뼈대를 잡고 실향민의 도움도 받았다. 이 때문일까. 고소한 부침개 냄새, 정감 있는 평안도 사투리, 이른 새벽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그림에서 묻어나는 것 같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